김호걸 여름이야기: GREEN

4 July - 4 August 2026

GREEN - 여름이야기 자연의 시간을 그리다

 

미술은 시대를 기록하지만, 어떤 화가들은 시대보다 더 오래 지속되는 것을 그린다.

김호걸 화백에게 그것은 자연이었다. 그러나 그의 자연은 풍경이라는 대상이 아니라, 인간이 세상을 이해하는 근원적인 질서이자 삶을 지탱하는 정신이었다.

반세기가 넘는 그의 화업은 결국 자연을 그린 시간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인간의 시간을 성찰해 온 여정이라 할 수 있다.

1934년 경북 영주 우금촌 두암고택에서 태어난 김호걸 화백에게 자연은 처음부터 예술의 소재가 아니었다.

예안 김씨 집성촌인 우금촌은 산과 들, 물길과 고택이 오랜 시간 하나의 생활문화와 정신세계를 이루어 온 공간이다.

그곳에서 자연은 인간과 대립하는 외부 세계가 아니라 삶의 질서를 배우고 마음을 닦는 터전이었다.

계절은 풍경의 변화가 아니라 삶의 리듬이었고, 산과 나무는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존재였다.

이러한 경험은 그의 회화를 이루는 가장 깊은 토양이 되었다.

김호걸 화백의 풍경에는 극적인 사건도, 장엄한 서사도 없다.

대신 화면에는 오래 바라본 사람만이 발견할 수 있는 시간의 밀도가 스며 있다.

산은 높음을 드러내지 않고, 나무는 형태를 과시하지 않으며, 들판은 고요한 호흡으로 화면을 채운다.

그의 풍경은 특정 장소를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안에 흐르는 생명의 질서와 시간의 순환을 시각화한 결과이다.

이번 전시의 제목인 **《GREEN 여름이야기》**는 이러한 작품세계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여기에서 'GREEN'은 하나의 색채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생명이 가장 왕성하게 숨 쉬는 계절이며, 자연과 인간이 함께 순환하는 시간의 이름이다.

김호걸 화백의 녹색은 자연을 채색하기 위한 색이 아니라 시간을 축적하는 색이다. 화면 속 연둣빛과 짙은 녹음, 빛을 머금은 초록의 층위는 계절의 변화이자 삶이 흘러온 시간이며, 생명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존재의 언어가 된다.

그의 회화를 바라보고 있으면 동아시아 산수미학의 오래된 전통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산수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옮겨 그리는 일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인간의 마음을 발견하는 예술이었다.

자연을 마주하는 일은 곧 자신을 성찰하는 일이었으며, 풍경은 정신이 머무는 장소였다. 김호걸 화백의 그림 역시 그러하다.

그는 자연을 재현하기보다 자연이 품고 있는 시간과 기운을 화폭 위에 옮긴다. 형태보다 기운을, 장면보다 호흡을, 순간보다 시간을 그리는 그의 회화는 한국적 자연관이 현대 회화 안에서 어떻게 계승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번 전시에서 처음 공개되는 1974년 정물화는 이러한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사과와 감, 석류, 병과 도자기를 담은 이 작품은 풍경 이전의 작업으로 보이지만, 실은 이후 풍경 세계의 출발점에 놓여 있다.

화면 안의 대상들은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서로의 관계 속에서 균형을 이루고, 빛과 색은 형태를 설명하기보다 공간의 호흡을 만들어낸다.

훗날 숲과 들, 산과 하늘을 그릴 때 드러나는 조형 감각과 색채 의식은 이미 이 정물화 속에서 분명하게 싹트고 있었다.

이번 전시는 197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이어지는 작품들을 통해 한 화가의 화풍 변화보다 더욱 본질적인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시대가 달라져도 변하지 않았던 시선이며, 자연을 대하는 태도이고, 예술이 삶과 맺는 관계이다.

김호걸 화백은 새로운 양식을 좇기보다 자신이 평생 마주해 온 자연을 끝없이 다시 바라보았다.

그 반복은 같은 풍경을 되풀이한 것이 아니라, 시간과 함께 깊어지는 사유의 과정이었다.

오늘 우리는 자연을 이미지로 소비하는 시대를 살아간다. 풍경은 빠르게 지나가고, 계절은 화면 속 배경이 된다.

그러나 김호걸 화백의 그림 앞에서 시간은 느려진다. 나뭇잎 사이를 스치는 바람과 계절이 스며드는 산빛, 들판 위를 흐르는 빛의 움직임은 관람자로 하여금 오래 머물러 바라보게 한다. 그의 회화는 자연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잊고 살아온 자연의 시간을 다시 회복하게 만든다.

결국 《GREEND여름이야기》는 여름을 이야기하는 전시가 아니다. 그것은 자연을 통해 삶을 이해하고, 시간 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묵묵히 탐구해 온 한 화가의 정신을 만나는 자리이다.

전시장에 놓인 작품들은 하나의 계절을 보여주는 풍경이 아니라, 자연과 함께 살아온 한 인간의 사유와 기억이 응축된 시간의 풍경이다.

오늘 우리가 마주하는 녹색은 식물의 색이 아니라 삶의 색이며, 계절의 색이 아니라 시간의 색이다.

그리고 김호걸 화백의 그림은 우리에게 조용히 일깨운다. 자연은 인간이 바라보는 대상이 아니라, 인간이 끝내 돌아가야 할 마음의 자리라는 것을.